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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벚나무, 일제강정기 본격화
조선시대까지 벚나무를 심은 이유는 대부분 벚나무의 목재를 활용하는 실용적인 용도때문이었으며
특히 벚나무의 껍질인 화피(樺皮)는 활을 만드는데 중요한 재료라서 국가적으로도 함부로 유통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2024년 04월 06일 [4차산업행정뉴스]

 

                    4월 5일 벚꽃이 만개된 낙동가 맥도 생태공원

 

[4차산업행정뉴스=서정용기자] 전국이 벚꽃이 만개된 가운데 축제가 펼쳐져 국민들이 봄맞이로 평화로운 여정이 이어지고 있어 우리나라에 벚나무가 자생된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한반도에 벚나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고문헌과 「동국이상국집」ㆍ「파한집(破閑集)」처럼 많이 알려진 시가에도 매화ㆍ살구ㆍ복숭아ㆍ자두 등 다양한 화목이 등장하지만 벚나무는 없었다

다만,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진한(辰韓)편에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중 상앵택(上櫻宅)ㆍ하앵택(下櫻宅)이 나오고,제2권 기이(紀異第二)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조(票訓大德條)에 앵통(櫻筒)이 등장한다. 그러나 ‘앵(櫻)’이라는 명칭은 앵두나무와 벚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헌과 기록의 ‘앵’을 벚나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의 반절이 벚나무 재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민족이 조선시대까지 벚나무를 심은 이유는 대부분 벚나무의 목재를 활용하는 실용적인 용도때문이었으며 특히 벚나무의 껍질인 화피(樺皮)는 활을 만드는데 중요한 재료라서 국가적으로도 함부로 유통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벚꽃축제가 최초로 개최된 서울 우이동의 벚나무 숲 역시 활을 만들기 위한 재료 수급용으로 조선시대 중후반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반면 오늘날처럼 집단적으로 벚꽃을 감상하였다는 풍습, 기록, 서화 등은 남겨져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부터 한반도에는 벚나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경성일보 1933년 4월 27일의 ‘경성의 벚꽃내역(京城の櫻の來歷)’에 따르면 경성에 벚나무가 처음으로 유입된 공간은 1907년 남산의 왜성대 공원이며,도입 품종은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櫻)라고 하였다.

 

- 경성의 벚꽃 내역(京城の櫻の來歷)’

경성에 사쿠라가 이식된 최초는 1907년 도쿄에서 3년생 묘목 1,500본을 가져와 남산 왜성대 공원에 500본을,나머지는 각지에 나누어 심게 된 때부터이다.다음 해인 1908년과 1909년에 걸쳐 오사카 부근의 소메이요시노 2년생을 창경원에 300수 심었다.왜성대의 사쿠라는 1914년에 가장 번성하여 하루에 10만에달하는 인파가 몰려든 적이 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으나 그 후 점차 나무들이 고사하여 그 명성이 창경원으로 옮겨갔다(경성일보 1933년 4월 27일자)기사

일단 한반도에서 벚꽃축제가 개최된 것은 1910년대 초반, 서울 우이동 지역이 최초였다. 우이동의 벚나무 숲은 본래 조선시대에 활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심어진 것이며 조선시대에 우이동 벚나무 숲에서 집단적으로 꽃놀이가 수행된 적은 없다. 그러던 것이 『매일신보』 1915년 5월 7일자에는 우이동 벚꽃 명소에 대해 “우이동의 사쿠라는 3년 전 일본인이 처음 발견한 이후부터 앵화의 명승지로 경성 내외에 이름이 널리 났다.”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략 일제강점기인 1912년 정도부터 최초로 벚꽃놀이가 개시된 것이다.

                  도로변에 식재된 벚나무 가로수


당시 매일신보에 따르면 도심에서 떨어진 자연적으로 벚꽃이 군집한 곳에 다수의 사람들이 여러 교통수단을 통해 운집해 특별한 인공설비 없이 주로 벚꽃을 중심으로 주간에 음악과 술과 놀이를 곁들여 봄을 즐겼다고 한다.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지배의 안정을 위해 조선 주민의 정치적 요구를 압살한 대신에 관제문화를 조성해 순응시키려 했으며 벚꽃축제는 그 수단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는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하여 벚꽃축제에 참여할 것을 장려하였고 이를 위하여 임시 관앵(觀櫻)열차를 운행하는 등 정책적으로 적극 협조하였다. 당시 경성의 벚꽃 명소로는 우이동 외에도 가오리(오늘날의 수유동, 가오리역 참조)도 있었다.

하지만 우이동은 도심에서 너무 멀리떨어진 외곽이었고 그 규모도 당시 폭증하던 벚꽃놀이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당시 조선으로 이주하던 일본인(재조일본인)은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조선에서도 하나미를 즐기면서 향수병을 달래려 했으나 막상 조선에는 벚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하나미를 위한 일본산 벚나무의 식재를 꾸준히 관계당국에 요구하였다.

 

벚꽃은 일본인에 대해서 일종의 인상을 주고 벚꽃이 있는 곳은 반드시 일본인의 용기를 북돋아 벚꽃의 번식은 곧 일본인의 번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래 한반도에는 벚나무가 적어 우리들은 재주 방인의 증가와 함께 벚나무를 이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花見の季節」, 京城新報. 1909년 4월 25일, 2면

1911년 조선에 건너와 충청남도 등지에서 15년간 주로 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한 일본인 관리의 말, "벚꽃은 일본의 대표 꽃이다 … 신주(神州)를 표상한다. 무사도를 생각하고 요시노(吉野)를 연상하며 불의명분에 맞서는 바로 국화(國華)로 보아야 한다 … 고향을 멀리 두고 조선에서 일하고 있는 모국인의 향수를 누그러뜨리고 그 땅에 친밀함을 갖게 하고 내지 연장의 싹을 키워서 안주(安住)할 생각을 굳히는 데 벚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국화이어야 한다" 豊田鉄騎, 星霧十五年, 帝國地方行政學會, 1926年, 238~239쪽.


30여년 전(1908~1909) 구한국(대한제국)에 머물던 내지인(일본인)들이 일본 국화(國花)인 사쿠라(벚꽃)를 그리워했다. 이때 창경원, 창덕궁, 경복궁 등에 5~6년 된 사쿠라나무를 내지(일본)에서 갖다가 심은 것이 조선 사쿠라의 시초다.(매일신보 1939년 4월 16일)

이에 따라 일제는 과거 창경궁이었던 창경원에 벚꽃축제를 개최하여 그 규모를 확대하게 된다.

창경원에 벚나무가 처음 심어진 것은 1908년부터 1909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 이식된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벚나무 300그루 정도였는데 이는 순종대부터였다. 이 무렵 순종은 덕수궁에서 나와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1908년 11월) 부친(고종)과 떨어져 살게 되어 매우 우울해 했다고 한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정미7조약’에 따라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고 있었고 궁내부 차관으로는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가 임명되어 있었는데 이완용, 이윤용 형제로부터 순종의 근황을 들은 고미야 미호마쓰는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여 소일거리를 하면서 우울감을 달래라고 권하였던 것이 시초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벚나무가 창경궁에 식재되었고 이후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당시 창경궁의 벚나무


다른 자료에 따르면 궁궐에 벚나무가 식재된 것은 창경궁이 동ㆍ식물원으로 조성되어 창경원으로 격하된 1909년 개원 이후라고 한다. 벚나무 식재과정은 개원부터 폐원까지 창경원의 원장을 지냈던 시모코리야마 세이이치(下群山誠一)가 1938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1938년 3월 26일)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창경원 개원 당시 일본 내지(內地)에서 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지식 정원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벚나무 2백주를 심었다고 하였다.그 후 해마다 종류와 수량을 늘려서 1938년 현재 창경원 벚나무 2천주는 30년 수령이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일제는 1918년부터 창경원에서 벚꽃놀이를 개시하였고 일부 특권층과 일본인들이 한적한 야간에 창경원에서 음주를 즐기며 밤벚꽃놀이를 즐기다가 문제가 되자 이를 일반에도 개방하자는 여론이 일어 1924년에는 야간 개원을 하여 밤벚꽃놀이까지 시작되었다.

이 외에도 다수의 장소에 벚나무가 식재되어 벚꽃놀이 명소가 생겼다.

봄을 대표하고 봄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꽂이며 … 벚꽃이야말로 실로 봄이 갖는 최대의 자랑이며 꽃 중의 왕이다. 그러나 우리조선에는 내지처럼 많은 벚꽃의 명소가 없다. 거기에는 예부터 이 나라 사람들이 벚꽃에 대한 감상의 생각이 부족했던 원인도 있다. 

 

벚나무는 겨우 군궁용(軍弓用)으로 썼기 때문에 경성 교외 가오리나 우이동에 식재된 이 외에는 별로 밀식된 곳도 없는 것이다 … 그런데 병합 이래 내지인의 이주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그들은 거의 그 국민성이라고도 할 만큼 벚꽃의 동경을 버리지 못하니 고국의 봄을 생각할 때도 조선에 벚꽃이 없음을 얼마나 쓸쓸하게 느꼈을까. 그 결과 백 그루 이백 그루라는 식으로 시험적으로 요시노자쿠라(吉野桜)의 이식을 시도하는 자가 나와 그 성적이 좋음이 실증되자 각지에서 다투어 이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차 벚꽃 명소가 곳곳에 생겨 봄에 더 많은 번창과 광명을 가져온 것이다

함경도에 들어가면 원산, 함흥, 성진, 주을 등에도 꽤 벚꽃이 심어져 북진(北鎭)의 중관(重關), 회령(會寧)에 이르기까지 거의 벚꽃이 재배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성황이다. 벚꽃과 함께 국력이 신장하여 야마토(大和) 민족의 발전을 보는 것은 기쁜 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조선의 봄도 내지에 뒤지지 않는 벚꽃을 보게 될 것이다. 특히 질서 있게 심어진 점에 산벚나무의 복잡함보다도 한층 경치를 좋게 하는 것이다. 亀岡栄吉(조선에 13년 이상 거주한 일본인 기자), 四季の朝鮮, 朝鮮拓殖資料調査会, 1926年, 5~6쪽.

일본인 거주 지역을 비롯하여 사직단과 효창묘(孝昌墓)처럼 조선왕조와 관련된 공간, 신규 조성된 근대공원, 신사 주변에도 대량으로 식재되어 경성의 벚나무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1910년에는 남산공원의 성격을 부각시키는 목적으로 식재하였고, 1919년에는 장충단, 1926년에는 사직단에 100여 주를 심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1911년 3월에는 목포 송도의 신사 경내에 벚나무 100주를 식재하였으며,1915년 이천신사의 사전 개축시 아까시 숲을 벌목하고 벚나무를 대량 식재했다. 이처럼 1907년 일본에서 묘목으로 도입된 벚나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경성의 각 공간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동아일보 1931년 12월 2일 기사에는 경성식림묘포(京城植林苗圃)에서 생산하는 조선 산앵(山櫻)은 정원용으로 매우 적당하여 희망하는 사람은 경성부 권업계(勸業係)에 신청하라고 하였다. 벚나무 규격은 간장(幹長)오척 이상(약 1.5m)으로 100본을 삼원칠십전으로 판매하는 것으로 보아 벚나무를 양육한 후 보급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경성의 벚나무 확산에는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많은 수의 벚나무 명소가 탄생했는데 가장 유명한 장소는 위의 창경원이었지만 남산 왜성대․장충단․삼청동도 벚꽃놀이 명소였으며 우이동도 전통의 명소였다(별건곤 1929년 4월호). 또한 인천 월미도,경상도 대구 달성공원ㆍ동래 온천장ㆍ신마산,충청도 청주의 앵마장(櫻馬場)ㆍ공주 금강가도(錦江街道),전라도의 광주공원ㆍ나주-순천가로,황해도 평양의 부벽루(浮碧樓)ㆍ경의선 사리원(沙里院), 강원도 춘천가도(春川街道) 등이 일제에 의해 생성된 벚꽃축제 명소였다.

이들 명소는 조선내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역을 포함하여 조선의 전통 공간(서울 광화문, 평양 부벽루 등)ㆍ근대 공원ㆍ신작로ㆍ진입가로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벚나무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 및 활동하거나 오락, 관광을 즐기는 공간에 집중적으로 식재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남산은 일본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거류지로서 관폐대사[13] 조선신궁과 조선총독부 초대 청사와 관저. 호국신사 등이 위치해 있었던 등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의 심장이자 일종의 '식민지 속의 식민지'였다. 일제는 이곳에 왜성대 공원(오늘날 숭의여자대학교 터)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왜성대공원(倭城大公園)은 1897년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선조들이 왜성을 쌓았다고 주장하면서 만든 공원이자 통감부가 위치한 곳으로,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전쟁에서 죽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갑오기념비가 설치되었다. 

 

또한 1909년에는 한양공원(남산 분수대 부근과 케이블카 승강장 150미터 남측 지점)을 조성해서 산길을 닦아 일본 벚꽃나무를 대거 옮겨 심었다.(왜성대공원은 해방후 한양공원과 통합되어 오늘날 남산공원이 되었다)

또한 을미사변에서 시해된 명성황후와 호위 군사 등 조선의 순국열사를 추모하던 장충단에 대해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폭탄 3용사 등의 일본 전몰군인을 추도하는 장충단공원으로 개조하였는데 일제는 이 왜성대공원과 한양공원, 장충단공원에 벚나무를 대규모 식재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산은 벚꽃놀이의 명소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서정용 기자  69894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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