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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추모 특별기획/ 용서함이 평화의 시작이다.
제주 4.3은 마을과 가정의 역사를 지웠다
필자 황요범 제주 4.3 피해자
2024년 04월 02일 [4차산업행정뉴스]

 

 

              북촌리 4.3사건 당시 주민 학살사건 기록 현장

제76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4월 3일 오전 10시 제주 4·3평화공원 위령제단·추념광장에서 거행된다. 

 

국민의힘 국회의원 원희룡 후보는 제주지사 당시  4.3사건과 관련 "제주도민 모두가 피해자"라면서 "반공이냐 친북무장대의 학살이냐의 논쟁보다는 화해의 차원에서 모두를 안고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제주4.3사건은 어느 일방의 학살을 규탄하는 방식으로는 역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4.3사건 당시 군경의 학살도 있었고, 남로당 무장공비대의 만행도 공존했다면서 반공과 용공의 이분법적 시각을 벗어나자고 했다. 

 

그는 자신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사촌형과 누이들도 군경과 남로당무장대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행불자가 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고 했다. 이어 "당시 8살의 어린 사촌형과 누나들이 무슨 이념을 알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제주도민들은 한집 걸러 4.3사건의 피해자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4.3사건 당시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이념논쟁과 일방적인 단죄 비판을 넘어서 모두를 안고 가는 역사와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북촌리가 고향인 황요범 전 초등학교 교장은 4.3사건 당시 피해 가족으로 북촌리 마을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마을에 비운이 감돌다.

 

1948년 6월 16일, 제주시를 향하던 경찰 가족 13명을 태운 우도 배가 북촌포구에 정박하였는데, 밤사이 경찰관 2명이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날이 밝자 마을은 온통 아수라장으로 돌변하였고,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감금하는 검거 열풍이 이어졌다. 이후 피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마을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사건 이후로 북촌은 「빨갱이 마을」로 지목받게 되었다.

 
우도 배 사건이 발생한 5개월 후, 초토화 작전이 극에 달하던 1948년 11월 16일, 군부대의 호출에 응한 24명의 민보단은 어려움에서 마을을 지키려는 청년들의 자생 단체로서, 낮에는 군경을 도와 요구사항에 협조하고, 때로는 무장대 토벌에도 동참하였으며, 밤에는 마을을 지키는 야경꾼이자 파수병이었다.

 

청년들은 한날한시에 날벼락을 당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이상영 씨의 증언에 의하면, “5월 10일 국민선거에 반대했으며, 폭도와 내통하고 있다.”는 생트집을 잡고 하룻밤을 감금했다가 다음 날 늦은 오후 낸시빌레에서 기관총으로 난사하였다.

 

여기에는 저의 아버지 형제가 있었다. 필자의 아버지는 왼쪽 눈언저리가 크게 손상되었고, 숙부님의 가슴에서는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북촌마을 주민 대학살의 도화선

 

여느 날처럼 마을 어귀 초소에는 섯동네 어르신 9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을 때였다 새벽녘에 동쪽에서 달려오던 자동차의 불빛이 초소를 막 지나나 싶더니 너븐숭이 쪽에서 심상치 않은 총소리가 들려왔다. 노인네들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예의 주시하던 차였다. 느닷없이 군인 셋이서 초소에 들이닥쳐 다짜고짜 화톳불을 걷어차며 노인들을 총대로 후려치고 발길질을 해댔다. 이른 새벽, 보초를 서던 할아버지가 허겁지겁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벌벌 떨었다.

 

“너븐숭이에서 군인이 죽었댄 햄쩌. 날 ᄇᆞᆰ는 대로 군인 시체를 군부대에 운구하고 가야할 거여.”
날이 밝자 아홉 명의 노인들은 들것을 만들어 군인 시체 2구를 함덕에 주둔한 2연대에 운구해 갔다. 이미 운동장에는 무장한 2,3백 명의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군인들은 사체를 사열대에 나란히 놓은 다음 조총을 울리며 장례행사를 치렀다. 

 

이어서 권총을 찬 대장이 연단에 올라서며 “오늘 새벽, 부대로 들어오던 우리 차량이 폭도들에게 기습을 당하여 아군 둘이 전사하였다. 애석하고 분함을 참을 수 없다! 이제 폭도마을인 북촌을 토벌할 것이다.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려라!”라며 벼락같은 명령을 내렸다.

곧이어 무릎을 꿇었던 노인들을 함덕초등학교 서녘의 구릉진 밭으로 끌고 가서 뭇매를 치고 난 후에 경찰 가족임을 밝힌 이군찬 씨를 제외하고 여덟 노인을 살해하였다.

-마을이 초토화되던 섣달 열여드레

 
이어 무장한 군인들은 마을 외곽을 포위하고, 무장대들이나 젊은이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집에 불을 지르며 마을 사람들을 학교로 내몰았다.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하여 갔으며, 학교에 운집한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학교 주변에는 이미 백여 명의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운동장에는 기관총을 3각으로 장전하여 도주를 미연에 차단하고 있었다.

 

이들은 김석도 씨를 군중 앞에 내세워 폭도 가족과 도피자 가족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순간 우리 가족은 민보단 가족으로 분류되어 운동장 서편에 있었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무더기로 인근의 야산과 밭으로 끌고 나가 사살하였다.

 

이에 앞서 민보단 단장이었던 장운관 씨를 비롯하여 문○섭씨 모친, 윤○삼의 모녀, 마을 지킴이 조영덕 씨 부부에게도 총격이 가해졌으며 뒤늦게 잡혀 온 한중돌 외 3명을 군중 앞에서 본보기로 사살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가족에 의하여 거둬졌으나, 마을지킴이 조영덕 씨 부부의 시신은 학교 서쪽 울타리 밖으로 내던져졌다.

 

때를 같이하여 교문 쪽에서 총성이 들렸다. 몰래 숨어가려던 아기엄마가 총에 맞아 뒹굴고 있었다. 어머니의 몸에서는 선혈이 내뿜고 있었으며 홑적삼 단추는 풀려 있었다. 배고파 울던 아기(한경림-필자와 동갑내기)는 젖가슴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젖을 빨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학교 마당 한 녘에는 생사를 가르는 장대 사이에서 휘몰리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형장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비명으로 아비규환의 도가니였다.

 

사살이 계속되고 있을 오후 4시경, 상급 지휘관의 ‘사살 중지!’ 명령으로 사살행위는 일단 멈춰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향하여 함구령이 떨어졌다.

 

“너희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 일단 살려둔다. 차후에 폭도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을 시는 씨를 말릴 것이다” 이어서 “내일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덕 군부대로 나오라.”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날 저문 저녁, 앞다투어 식구들의 시체를 찾아 나섰다. 당팟, 너븐숭이, 등지에 쓰러져 죽어 있는 모습이 마치 뽑아 놓은 무처럼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형제자매를 찾는 울부짖음은 동지섣달의 차가운 밤기운도 잠재우지 못하였다.

-함덕리에서의 피난살이

 

소개령을 받은 마을 사람들은 이웃 마을의 군부대(함덕국민학교)에 수용된 후에도 혐의가 있는 사람들의 색출은 계속되어 50여 명을 더 희생시켰다.

 
심문을 받고 군부대를 나오던 늦은 오후, 군부대 입구에는 삼촌 내외분이 (박순옥-필자의 어머니 의자매, 일본 거주) 마중 나와 있었다. 온종일 누이네가 보이질 않자 모두 죽었겠다고 낙심하며 뒤돌아서는 참이었다. 삼촌(박순옥의 오빠)은 우리 10식구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외양간의 소를 마당으로 끌어내고 보리 짚을 깔아 잠자리를 마련해주셨다.

 
다음 날 아침, 생사를 모르는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외삼촌(이군찬, 필자의 외삼촌)을 만나서 지난밤에 보초 섰던 여덟 사람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형장에는 쏟은 피가 낭자해 있었으며. 맷 자국마다 피멍이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피에 저린 시체를 부둥켜안고 실신하셨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여덟 어르신의 시신은 ᄀᆞᆯ매뭇에 토롱하였다가 피난살이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후 군인들의 감시를 피하여 억수동 동산 밭에 묻혔다.

-4.3 성은 누구를 위한 성이었나?

 

4.3 성담은 산 사람(당시는 폭도라 불렀다)들의 잠입을 경계하고 마을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마을을 에워싼 성벽을 말한다.

 

이 4․3성담은 군․경의 명령으로 쌓게 되었는데 북촌리는 주민 집단 대학살을 치르고 함덕리에서의 피난 생활을 끝내고 마을로 복귀한 후에 2, 3년에 걸쳐 쌓았다.

 
유감스럽게도 성담을 쌓은 후 여러 해 동안은 잠입하는 사람이나 이로 인한 불길한 사건은 한 건도 생기지 않았다. 성담을 쌓게 한 것은 하나의 대량학살을 정당화하고 폭도의 실상을 의식화하려는 권모술수이자 간교한 획책이었다.

 
제주에는 본래부터 폭도(暴徒)가 없었다. ‘폭도’라는 명칭은 토벌대에 쫓겨 산으로 피신하여 숨어다녔거나 군경과 대치하였던 사람들로서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불렀던 이름이다. 

 

무장대의 구호는 『군경의 탄압을 멈추고, 이 땅에서 미군을 철수하며, 통일국가 건설을 가로막는 단선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4.3을 일으킨 지도자를 비롯한 무장대에 대하여 역사의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같은 성담을 쌓는 데는 살아남은 몇몇 노인과 부녀자가 중심이 되어 한여름 한겨울을 가리지 않고 매일같이 성담 쌓는 일에 마을 전향이 동원되었다.

 

4.3 비통의 성은 1948년 4.3 봉기에서 비롯된 제주에서의 초토화작전은 상상을 초월한 방화와 살상이 난무했던 광란의 무대였다.

 

비통의 성은 4.3이 할퀴고 간 흉측한 상흔이며, 민초의 가슴에 못을 박은 비통함의 자국이다. 이 또한 살아남은 자들의 족쇄이자 탄압의 벽이었다.

-국가유공자, 제2연대 장병들의 실체

 

여기, 국가유공자, 제2연대 중위 박재규 이하 23명의 열사비는 당시 최대 승전 지 (북촌리 꿩동산)에 세워졌으나, 1962년 조천읍 충혼묘지를 조성하면서 이곳으로 이설되었다. 여기 열사 23명을 포함한 제2연대 장병들의 혁혁한 전과와 탁월한 공적은 이러하다.

-비석의 전문(해석)-

육군 중위 박재규 이하 23명의 여러 열사는 일찍이 여․순 사건을 진압하고, 서기 1949년 11월 28일 제주 주둔 이래 끊임없는 전투에서 탁월한 공적을 세우고, 서기 1949년 1월 16일 북촌리에서 빨갱이(적비) 소탕에 진력을 다하였으며, 같은 해 2월 4일에 우세한 빨갱이 섬멸전을 전개하여 치명적 타격을 주고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불행히도 흉탄이 명중하여 명예롭게 전사하였음 1949년 7월 육군 보병 제2연대 장병 일동

이들은 1948년 12월 16일, 북촌리 민보단 청년 24명을 군부대로 불러들인 후, 5.10 국민선거에 반대하였으며, 폭도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빌미를 씌워 낸시빌레에서 기관총으로 난사하였다. (생존자 이상영 씨의 증언)

또한 1948년 12월 21일, '자수하면 죄를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고 사람들을 유인한 후, 자수하러 온 조천면 지역 주민 150여 명을 아라동 박성내로 끌고 가서 사살한 후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북촌리 이만식 씨, 신촌리 김◌준 씨 증언)

한 달 후인 1949년 1월 16일 새벽, 너븐숭이 비탈길에 매복했던 무장대의 기습을 받고 군인 2명이 사망한 데 따른 보복으로 온마을에 불 지르고 400여 명의 주민을 집단학살하였다.


이외에도 주목할 점은, 제2연대 장병들이 함덕리에 주둔 한 이래 이들은 조천면 주민 1,800여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갔으며. 게다가 5개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살아남은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강제 소개하였다.

 

이처럼 4.3 진압과정에서 제주의 곳곳을 초토화하고 2만여 명의 목숨을 학살한 그 중심에는 육군 보병 제2연대 장병들이 있었다.

-용서함이 평화의 시작이다

 

용서는 삶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용서를 일곱 번 하면 됩니까?’ 란 물음에 예수가 답하기를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라고 답하였다.


진정한 평화는 서로가 아픔을 내려놓고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앙금의 벽을 헐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내가 용서하고, 우리가 용서하고 사회가 용서할 때 진정한 평화의 길은 하나둘 열리리라

4차산업행정뉴스 기자  69894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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