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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PD/ 설날, 떡국을 먹다
왕현철 (전 KBS PD/왕PD의 토크멘터리 조선왕조실록 저자)
2024년 02월 08일 [4차산업행정뉴스]

 


 

설날, 떡국을 먹다,,,

“올해는 다행으로 나이를 먹지 않았네.”
“왜 그렇습니까?”
“설날에 떡국을 먹지 않았기 때문일세.” <몽경당일사 제5편/서경순>

1856년 1월 1일, 철종 때 청나라 사신으로 간 서경순은 문서를 작성하는 주부(主簿)에게 연경의 타향에서 설날 아침 떡국을 먹지 않은 서글픈 심정을 이렇게 에둘러댔다. 설날에는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시대에 중국과 일본을 다녀온 사신의 기록을 보면 떡국 이야기가 있다. 공통점은 새해 첫날에 세 나라 모두가 떡국을 먹었다. 원문은 모두 탕병(湯餠, 떡국으로 번역)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조선은 자른 떡, 중국은 수제비 혹은 떡과 만두, 일본은 국수 형태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물을 붓고 끓여서 먹는 것은 같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집안의 제사 등에 올리는 음식을 정해주었다. 정월 초하루는 떡국과 원양견을 올리도록 했다. <성호전집 제48권/참례>

 
이익은 떡국은 떡을 잘라서 끓인 것이고, 원양견은 술을 넣은 반죽을 발효시키고 말려서 기름에 튀겨 부풀려 튀밥을 붙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양견은 일종의 강정이다.

 
또한 어린아이를 낳은 지 3일, 만 한 달, 만 1년이 되는 날도 떡국으로 축하연을 열었다. 이것을 탕병회(湯餠會), 즉 떡국을 먹는 모임이라고 했다. 주로 늦둥이를 본 부모가 탕병회를 열었다. 탕병회에 초대받고 참석하지 못하면 대신 글을 보냈다.

“듣건대 밤의 상서로운 기운이 마을에 가득해서 봉황 새끼 얻은 경사를 맞이했구려 늙은 조개가 진주를 낳았다고 말들이 많다네.” <사가시집 제2권/서거정>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은 친구 유태초의 득남으로 탕병회에 초대받았으나 병으로 가지 못해서 시를 보내서 축하했다. 탕병회의 시는 약간 해학적인 내용으로 보내는 것이 특징이다. 늘그막에 자식을 본 것에 대해서 놀림조의 축하였다.

떡국은 이처럼 새해를 맞이하거나 집안의 축하 행사가 있을 때 먹는 음식이었다.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였다.

또한,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고도 했다.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나이를 먹고 싶지 않아서 새해에 떡국을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해마다 나이를 더하는 것이 밉고 서글퍼라. 나는 이제 떡국을 먹고 싶지 않구나.” <청장관전서 제1권/영처시고>

<홍길동>의 저자 허균은 음식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덕택에 어릴 때부터 온갖 진귀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또한 부잣집에 장가들고, 임진왜란의 피난이나 벼슬을 하면서 전국의 별미를 골고루 즐길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맛본 팔도 음식을 기록해서 <도문대작>을 펴냈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한성에서 먹는 겨울철 음식으로 떡국을 꼽았다. 겨울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국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 외 떡국을 조리하는 방법이나 모양에 따라서 자병, 증병, 절병, 월병 등으로 나누고 사시사철 먹을 수 있다고도 했다.

 
조선의 제18대 현종은 지독한 가뭄으로 백성이 곤궁에 처하자, 세종이 편집한 <구황촬요>를 보완해서 민간에게 반포하고자 했고, 그 서문을 송시열에게 맡겼다. 

 

<구황촬요>는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 이외에 먹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적은 책이다. 

 

송시열은 <구황촬요>에 소개된 방법으로 겨울의 시련을 견뎌내고 새해를 맞이해서 백성이 떡국 한 사발을 먹기를 바랐다.

“백성들은 올겨울 눈보라 속에 얼어 죽지 않고 내년에는 큰 사발의 떡국을 배불리 먹기를 바랍니다.” <송자대전 제137권/서>

임금의 선정은 백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 상징이 새해를 맞이해서 백성들이 떡국을 먹는 것이었다.

 
정조 때의 좌의정 채제공과 공조 판서 이가환은 서학(천주교)의 처리 문제로 의견이 갈렸다.

 

 두 사람 사이의 틈은 조정을 불안하게 했고 정조도 우려했다. 주변에서 채제공에게 달 밝은 밤에 답교(踏橋, 다리밟기)를 하면서 화의를 권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채제공은 밤늦게 광통교에 장막을 치고 이가환을 조용히 불렀다. 상에는 구운 고기와 떡국이 올려져 있었다. 

 

채제공은 이가환과 무릎을 맞대고 떡국을 먹으면서 서로의 속내를 주고받았다. 다리밟기하는 장안의 백성이나 신하들이 그 모습을 봤다.

“두 분의 사이가 저렇게도 좋단 말인가?” < 다산시문집 제15권/정약용>

두 사람이 떡국 먹는 모습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은 사라졌다. 정조는 후일 채제공에게 ‘경이 늙으면 누가 대신할 수 있소?’라고 물었을 때, 채제공은 서슴없이 이가환이라고 대답했다. 정조도 이미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맞장구를 했다. 떡국은 화해의 음식이었다.

이처럼 떡국 한 그릇에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떡국은 나이를 먹는 음식이고, 축하 음식이고, 장수를 기원하는 음식이고, 백성의 배를 불리는 음식이고, 화해하는 음식이었다.

 

떡국은 타향의 서글픔이 담겨 있고, 나이를 먹는 음식이고 , 축하 음식이고, 장수를 기원하는 음식이고, 백성의 배를 불리는 음식이고, 화해하는 음식이었다.

4차산업행정뉴스 기자  69894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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