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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왕PD 반석평, 노비에서 판서에 오르다
왕현철 (전KBSPD, 조선왕조실록 저자)
2023년 12월 02일 [4차산업행정뉴스]

 

 

추노(KBS2TV, 2010년 방송, 도망치는 노비를 쫓는 이야기)

 

 반석평, 노비에서 판서에 오르다

조선은 계급사회였다. 양반, 중인, 양인과 그 아래 천민이 있었다. 천민은 노비, 종, 백정 등 다양한 형태로 불렸고 최하위 계급이다. 그런데 이 최하위 계급에서 오늘날의 장관, 판서에 오른 인물이 있다. 반석평이다. 신분의 차별이 있었던 조선 시대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석평은 어떻게 노비에서 판서까지 올랐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반석평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중종 4년으로 사관의 직책이다. 사관은 과거에 합격해서 똘똘한 인재가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석평은 과거에 합격한 유능한 인재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천민은 권리와 의무가 없고 주인이 사고팔 수 있는 존재여서 세금이나 노역의 부담을 지지 않지만, 과거 시험을 치를 자격도 없었다. 그런데도 반석평이 천민의 신분에서 과거에 합격하고 사관이 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이유를 설명한 두 가지 기록이 있다.

“반석평은 천얼 출신으로 시골에 살았다. 그의 할머니가 학문에 뜻이 있음을 알고서,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았고, 할머니는 길쌈과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반석평의 학문을 도왔다. 반석평은 과거에 합격해서 여러 관직을 거쳐서 판서에 올랐다.” <중종실록 9년 2월 3일>



“반석평은 어떤 재상집의 종이었다. 재상은 반석평의 재주와 성격을 사랑해서 경서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재상은 어떤 아들 없는 부잣집에 부탁해서 아들을 삼도록 하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 서로 왕래하지 말라 했다. 반석평은 나중에 문과에 합격해서 재상까지 올랐다.” <성호사설 제10권 /이익>


<중종실록>과 <성호사설>을 종합하면, 반석평이 천민 출신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과거에 합격한 것은 신분 세탁을 설명한 <성호사설>이 <중종실록>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남의 집 아들로 신분을 바꾸어서 과거에 합격하고 관리가 된 것이다.

반석평은 문과에 합격했지만, 무에도 재능이 있어서, 함경도 경차관이 돼서 여진족의 실태를 파악하고 경흥 부사가 된다. 경흥은 두만강에 인접한 국경 지역으로서 국방의 요지였고 경흥부사는 종3품이다. 반석평은 종5품이었다. 4단계의 품계가 부족하지만 이조 판서 안당은 반석평을 발탁하고 그 이유를 밝혔다.

“반석평의 품계는 비록 미달하지만, 그는 문무를 겸하는 재주를 지녔으므로 발탁해서 시험해 볼 만합니다.” <중종실록 11년 2월 28일>

좌의정 정광필도 반석평은 직급은 낮지만, 변방의 부사로서 적합하다고 추천했다. 중종은 4단계의 품계를 뛰어넘는 반석평의 천거를 받아들였다.

북방 지역은 문신으로서 무재가 있거나 무신으로서 학술이 있는 젊은 자를 임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반석평은 이 조건에 해당하였고, 그의 발탁은 다른 능력 있는 자를 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경원 부사, 만포 첨사, 함경남·북도 절도사를 맡는다. 그의 젊은 시절은 주로 북방의 여진족 방어에 힘을 쏟았다.

그는 내직으로 들어와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충청도·전라도·경상도 관찰사가 됐다. 그가 전라도 관찰사 때 아내가 죽어서 충분한 장례 절차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했다. 그는 평안도 관찰사까지 맡는다. 4도의 관찰사가 되는 특이한 예로 그에 대한 평가가 좋았음을 알 수 있다.

중종 31년, 반석평이 사관이 된 지 27년 만에 공조 판서가 된다. 판서는 정2품이다. 당시 반석평은 종2품으로 자격 미달이었다. 중종은 품계를 뛰어넘어서 그를 판서로 임명했으나 사헌부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된다. 이후 종2품이 맡는 공조참판, 형조 참판, 한성 판윤이 됐다.

그가 한성 판윤이 될 때는 홀로 추천됐다. 보통은 세 명이 추천돼서 임금이 한 명을 임명하지만, 그만큼 적임자였다는 것이다.

반석평은 공조 판서에서 좌절된 3년 후 형조 판서가 된다. 드디어 재상이 되었다. 형조는 역모죄를 제외한 일반적인 죄와 소송, 노비 관련 업무도 담당한다. 그는 특히 노비 관련 법이나 소송에 관심을 기울였고, 기회 있을 때마다 억울한 노비가 없도록 여러 차례 건의했다. 그는 자신의 지난 신분을 잊지 않고, 한 명의 억울한 노비가 없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형조 판서가 된 6개월 후 졸했다. 중종은 반석평이 재상으로 죽었으므로 특별히 부의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반석평의 인격을 알 수 있는 예를 실었다.

반석평은 옛 주인의 자손을 길에서 만났다. 행색이 초라했다. 그는 초거(軺車)에서 내렸다. 초거는 종2품 이상이 타는 수레다. 반석평은 비록 고관이 되었으나 옛 주인의 자손에게 달려가서 절하였다.

반석평은 조정에 돌아와서 자신의 옛 신분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자신의 벼슬을 깎아서 주인의 자손에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다. 조정은 그의 고백을 장하게 여겨서 반석평의 자리를 그대로 두고, 그 자손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칭찬했다.

이익은 자신의 과거를 밝힌 반석평과 옛 주인의 자손에게 취한 조정의 조치를 대단하게 여기고, 세상 풍속을 분발하게 만들고, 재주 있고 덕 있는 자가 더욱더 발탁될 수 있는 감동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정조 때 사헌부 헌납 성덕조도 인재 발탁의 범위를 넓히라는 상소를 올리고 반석평의 예를 들었다.

“반석평은 비록 천민이었지만 결국 훌륭한 신하가 되었습니다.” <정조실록 1년 1월 29일>

성덕조는 <주역>에서 ‘샘을 깨끗이 치웠으나 (길 가는 사람이) 물을 마시지 못하니 나의 마음이 슬프다.’를 인용해서, 하늘이 내린 인재가 기용될 기회를 얻지 못해서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정조에게 청을 올렸고, 정조는 그의 청을 기특하게 여겼다.

반석평은 노비로 태어났으나 열심히 노력해서 과거에 합격하고, 훌륭한 역할로 판서에 올라서, 여러 사람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는 예가 되었다.

4차산업행정뉴스 기자  698940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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